제2차 오히라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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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오히라 내각은 1979년 11월부터 1980년 7월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내각이다.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의석 감소로 인해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책임론이 제기되었고, 내각 불신임 결의안 가결로 중의원 해산과 참의원 선거 및 중의원 선거 동시 실시(중참 동일 선거)가 결정되었다. 선거 기간 중 오히라 총리가 급서하면서 이토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이 총리 임시 대리를 맡았고, 이후 스즈키 젠코 내각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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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일본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그로 인한 해산으로 치러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스즈키 젠코 총리 취임으로 이어졌고, 이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과 야당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1980년 일본 - 제1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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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7일에 실시된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자유민주당이 압승했으나 일본사회당 의석 감소와 일본공산당의 약진 등 다양한 정당들의 성과와 지역별 의석 분포 변화를 보였다. - 1979년 일본 - 제1차 오히라 내각
오히라 마사요시가 1978년 12월 7일에 출범시킨 제1차 오히라 내각은 오일 쇼크 경제 위기 극복,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물가 상승, 정치 스캔들, 정책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다.
제2차 오히라 내각 | |
---|---|
기본 정보 | |
내각 이름 | 제2차 오히라 내각 |
내각 번호 | 69대 |
관할 국가 | 일본 |
출범일 | 1979년 11월 9일 |
해산일 | 1980년 7월 17일 |
국가 원수 | 쇼와 |
정부 수반 | 오히라 마사요시 대행: 이토 마사요시 (1980년 6월 12일 - 7월 17일) |
집권 정당 | 자유민주당 |
야당 | 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주사회당 일본공산당 |
의회 현황 | 다수 정부 (하원) |
선거 | 제36회 총선 (1980년) 제12회 참의원 선거 (1980년) |
이전 내각 | 제1차 오히라 내각 |
다음 내각 | 스즈키 젠코 내각 |
기타 정보 | |
해산 | 1980년 5월 19일 해프닝 해산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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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적 배경
1979년 10월 7일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의석을 크게 잃었다. 이에 오히라 마사요시 총재에 대한 책임론이 후쿠다 파, 나카소네 파, 미키 파, 나카가와 그룹 등 비주류 파벌을 중심으로 제기되며 격렬한 당내 항쟁(40일 항쟁)이 벌어졌다.[2]
국회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 주류파인 오히라와 비주류파인 후쿠다 다케오가 맞붙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결선 투표에서 신 자유 클럽의 표를 얻은 오히라가 제69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3]
외교 면에서는 당시 일본의 주요 가상 적국이었던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중소 대립)을 중시하며 중국의 근대화에 적극 협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79년 12월, 오히라는 중국을 방문하여 정부 차관 제공을 약속하고 「일중 문화 교류 협정」에 서명하여 1980년대 일중 관계 긴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2. 1. 40일 항쟁과 내각 구성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의석수가 크게 줄었다. 이에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며,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등 비주류 파벌을 중심으로 격렬한 당내 항쟁(40일 항쟁)이 벌어졌다.[11] 국회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오히라와 후쿠다가 동시에 후보로 나서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결선 투표 결과, 신 자유 클럽의 지지를 얻은 오히라가 총리로 재지명되었다.[12]오히라는 신 자유 클럽과의 연립 정부 구성을 모색했으나,[13] 당내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1979년 11월 9일에는 오히라가 임시로 문부대신을 겸임하는 형태로 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시켰고, 1979년 11월 20일 다니가키 센이치를 문부대신으로 임명하면서[13] 당내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2. 2. 내각 불신임과 중참의원 동시 선거
1980년 5월, 집권 여당인 자유민주당 내의 반란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었다. 이에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은 중의원의 해산(통칭 해프닝 해산)을 단행, 이미 예정되어 있던 제1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와 같은 날에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중참 동일 선거였다.선거 기간 중이던 6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심근 경색으로 급서하면서, 이토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이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를 맡게 되었다. 오히라 내각은 사실상 총사퇴했으며, 이후 스즈키 젠코 내각이 출범할 때까지(1980년 7월 17일) 36일 동안 직무 집행 내각이 운영되었다.[18]
3. 주요 정책
1979년 10월 7일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의석수를 크게 줄이면서, 당내에서 오히라 마사요시 총재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른바 '사십일 항쟁'이라 불리는 격렬한 당내 항쟁이 벌어졌다.[2]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도 자유민주당 내 주류파인 오히라와 비주류파인 후쿠다 다케오가 맞서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신자유 클럽의 표를 얻은 오히라가 제69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3]
내각 구성 과정에서 신자유 클럽과의 연립 정권 구성이 논의되었으나, 비주류파의 반발로 난항을 겪었다. 1979년 11월 9일, 오히라 총리가 문부대신을 임시 겸임하는 형태로 제2차 오히라 내각이 발족되었고, 이후 타니가키 센이치가 문부대신에 임명되면서 당내 항쟁은 일단락되었다.[4]
소련과 대립하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79년 12월, 오히라 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정부 차관 제공을 약속하고 일중 문화 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3. 1. 외교 정책
오히라 내각은 당시 일본의 주요 가상 적국이었던 소련(소비에트 연방)과 대립하던 중화인민공화국을 중시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2] 1979년 12월, 오히라 총리는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정부 차관 제공을 약속하고, '중일문화교류협정'을 체결했다.[2] 이는 1980년대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 관계가 긴밀해지는 데 초석을 놓았다.3. 2. 경제 정책
제2차 오히라 내각은 1979년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어려워졌고,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 문제가 심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다음은 제2차 오히라 내각의 경제기획정무차관 명단이다.
직책 | 이름 |
---|---|
경제기획정무차관 | 호리우치 도시오 |
한편, 오히라 내각은 당시 일본의 주요 가상 적국이었던 소련과 대립하는 중화인민공화국(중소 분쟁)을 중시하는 자세를 보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대화에 적극 협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2] 1979년 12월,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정부 차관 제공을 약속하고 「일중 문화 교류 협정」에 조인하여, 1980년대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계기를 마련하였다.[2]
4. 내각 명단
직책 | 성명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1980년 6월 12일 사망 |
부총리 내각관방장관 | 이토 마사요시 |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 (1980년 6월 12일 ~ 7월 17일) |
법무대신 | 구라이시 다다오 | |
외무대신 | 오키타 사부로 | 국회 비회원 |
재무대신 | 다케시타 노보루 | |
문부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권한대행 ( ~ 1979년 11월 20일) |
다니가키 센이치 | 1979년 11월 20일 임명 | |
보건대신 | 노로 교이치 | |
농림수산대신 | 무토 가분 | |
통산대신 | 사사키 요시타케 | |
운수대신 | 지자키 우사부로 | |
우정대신 | 오니시 마사오 | |
노동대신 | 후지나미 다카오 | |
건설대신 | 와타나베 에이이치 | |
내무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홋카이도 개발청장 | 고토다 마사하루 | |
내각총리대신 관저장 오키나와 개발청장 | 오부치 게이조 | |
행정관리청장 | 우노 소스케 | |
방위청 장관 | 구보타 엔지 | 1980년 2월 4일 사임 |
호소다 기치조 | 1980년 2월 4일 임명 | |
경제기획청장 국제경제담당대신 | 쇼지 게이지로 | |
과학기술청장 | 오사다 유지 | |
환경청장 | 쓰치야 요시히코 | |
국토청장 | 소노다 기요미쓰 | |
내각관방부장관 | 가토 고이치 | 정무담당 |
오키나 규지로 (관료) | 총무담당 | |
내각법제국장 | 쓰노다 레이지로 (관료) | |
내각총리대신 관저 내각관방부장관 | 아이노 고이치로 | 정무담당 |
간노 히로오 (관료) | 총무담당 1979년 11월 10일 임명 |
1979년 11월 13일에 정무차관이 임명되었다.[4] 단, 산토 아키코 환경정무차관은 전 내각에서 유임되었다.
직책 | 성명 |
---|---|
법무 정무 차관 | 히라이 다쿠시 |
외무 정무 차관 | 마쓰모토 주로 |
대장성 정무 차관 | 고이즈미 준이치로, 엔도 요 |
문부 정무 차관 | 미즈카 히로시 |
후생 정무 차관 | 이마이 이사무 |
농림 수산 정무 차관 | 곤도 데쓰오, 이토야마 에이타로( ~ 1980년 4월 18일), 마스다 사카루(1980년 4월 18일 ~ ) |
통상 산업 정무 차관 | 가지야마 시즈로쿠, 도즈카 신야 |
운수 정무 차관 | 나라하시 스스무 |
우정 정무 차관 | 하세가와 신 |
노동 정무 차관 | 사이토 에이사부로 |
건설 정무 차관 | 다케나카 슈이치 |
자치 정무 차관 | 야스다 기로쿠 |
행정 관리 정무 차관 | 미야자키 시게카즈 |
홋카이도 개발 정무 차관 | 아베 후미오 |
방위 정무 차관 | 소메야 마코토 |
경제 기획 정무 차관 | 호리우치 토시오 |
과학 기술 정무 차관 | 나츠메 다다오 |
환경 정무 차관 | 산토 아키코 (유임) |
오키나와 개발 정무 차관 | 이에 토시아키 |
국토 정무 차관 | 모치즈키 구니오 |
4. 1. 각료
직책 | 성명 | 비고 | |
---|---|---|---|
내각총리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1980년 6월 12일 사망 | |
부총리 내각관방장관 | 이토 마사요시 |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 (1980년 6월 12일 ~ 7월 17일) | |
법무대신 | 구라이시 다다오 | ||
외무대신 | 오키타 사부로 | 국회 비회원 | |
재무대신 | 다케시타 노보루 | ||
문부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권한대행 ( ~ 1979년 11월 20일) | |
다니가키 센이치 | 1979년 11월 20일 임명 | ||
보건대신 | 노로 교이치 | ||
농림수산대신 | 무토 가분 | ||
통산대신 | 사사키 요시타케 | ||
운수대신 | 지자키 우사부로 | ||
우정대신 | 오니시 마사오 | ||
노동대신 | 후지나미 다카오 | ||
건설대신 | 와타나베 에이이치 | ||
내무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홋카이도 개발청장 | 고토다 마사하루 | ||
내각총리대신 관저장 오키나와 개발청장 | 오부치 게이조 | ||
행정관리청장 | 우노 소스케 | ||
방위청 장관 | 구보타 엔지 | 1980년 2월 4일 사임 | |
호소다 기치조 | 1980년 2월 4일 임명 | ||
경제기획청장 국제경제담당대신 | 쇼지 게이지로 | ||
과학기술청장 | 오사다 유지 | ||
환경청장 | 쓰치야 요시히코 | ||
국토청장 | 소노다 기요미쓰 | ||
내각관방부장관 | 가토 고이치 | 정무담당 | |
오키나 규지로 (관료) | 총무담당 | ||
내각법제국장 | 쓰노다 레이지로 (관료) | ||
내각총리대신 관저 내각관방부장관 | 아이노 고이치로 | 정무담당 | |
간노 히로오 (관료) | 총무담당 1979년 11월 10일 임명 | ||
colspan="4" | | |||
출처:[1] |
4. 2. 정무 차관
1979년일본어 11월 13일에 임명되었다.[4] 단, 산토 아키코 환경정무차관은 전 내각에서 유임되었다.직책 | 성명 |
---|---|
법무 정무 차관 | 히라이 다쿠시 |
외무 정무 차관 | 마쓰모토 주로 |
대장성 정무 차관 | 고이즈미 준이치로, 엔도 요 |
문부 정무 차관 | 미즈카 히로시 |
후생 정무 차관 | 이마이 이사무 |
농림 수산 정무 차관 | 곤도 데쓰오, 이토야마 에이타로( ~ 1980년일본어 4월 18일), 마스다 사카루(1980년일본어 4월 18일 ~ ) |
통상 산업 정무 차관 | 가지야마 시즈로쿠, 도즈카 신야 |
운수 정무 차관 | 나라하시 스스무 |
우정 정무 차관 | 하세가와 신 |
노동 정무 차관 | 사이토 에이사부로 |
건설 정무 차관 | 다케나카 슈이치 |
자치 정무 차관 | 야스다 기로쿠 |
행정 관리 정무 차관 | 미야자키 시게카즈 |
홋카이도 개발 정무 차관 | 아베 후미오 |
방위 정무 차관 | 소메야 마코토 |
경제 기획 정무 차관 | 호리우치 토시오 |
과학 기술 정무 차관 | 나츠메 다다오 |
환경 정무 차관 | 산토 아키코 (유임) |
오키나와 개발 정무 차관 | 이에 토시아키 |
국토 정무 차관 | 모치즈키 구니오 |
5. 오히라 총리 급서와 사후 정국
1979년 10월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의석수가 크게 줄었다. 이 때문에 제1차 오히라 내각에서 비주류였던 파벌들은 오히라 마사요시 총재의 책임을 추궁하며 격렬한 당내 항쟁을 벌였다.( 사십일 항쟁 )[2]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도 자유민주당 주류파인 오히라와 비주류파인 후쿠다 다케오가 맞붙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결선 투표 끝에 신자유 클럽의 표까지 얻어 오히라가 제69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3]
내각 구성에서는 신자유 클럽과의 연립 정권 구성을 모색했으나, 비주류파의 반발로 난항을 겪었다. 결국 오히라 총리가 문부대신을 임시 겸임하는 형태로 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시켜 연립 정권 구성을 위한 여지를 남겼다. 이후 신자유 클럽 출신 각료 임명을 단념하고, 자유민주당의 다니가키 센이치를 문부대신에 임명하여 당내 항쟁은 일단락되었다.[4]
외교 면에서는 당시 일본의 주요 가상 적국이었던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을 중시하는 자세를 보이며, 중국의 근대화에 적극 협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79년 12월 오히라 총리는 중국을 방문하여 정부 차관 제공을 약속하고 「일중 문화 교류 협정」에 조인, 이후 1980년대 일중 긴밀화의 길을 열었다.
1980년 5월, 자유민주당 내 반란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자, 내각은 중의원 해산(해프닝 해산)을 단행하고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일 투표일에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는 중참 동일 선거를 사상 최초로 실시했다. 그러나 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에 오히라 총리가 심근경색으로 급서하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5. 1. 오히라 총리의 사망
1980년(쇼와 55년) 5월, 여당인 자유민주당 내의 반란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자, 내각은 중의원 해산(일명 해프닝 해산)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미 예정되어 있던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제12회)와 같은 날에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6회)를 실시하기로 결정, 사상 최초로 중참의원 동시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심근경색으로 급서하였다.[2] 이에 내각관방장관 이토 마사요시가 총리대신 임시 대리로 취임하여 내각은 형식적으로 총사퇴했다.5. 2. 이토 마사요시 총리 대행 체제
1980년(쇼와 55년) 5월, 여당인 자유민주당 내의 반란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었다. 이에 내각은 중의원 해산(일명 해프닝 해산)을 단행하고, 이미 예정되어 있던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와 동일 투표일에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는, 사상 초유의 중참 동일 선거를 결정했다. 그러나 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에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면서, 내각관방장관 이토 마사요시가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에 취임하고 내각은 형식적으로 총사퇴했다.[9] 총사퇴한 전 내각은 일본국 헌법 제71조에 따라, 선거 후 특별 국회에서 스즈키 젠코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된 같은 해 7월 17일까지 36일간 직무 집행 내각을 운영했다.일본국 헌법은 내각총리대신이 없을 때에는 내각이 그 핵심 존재를 잃게 되므로 당연히 총사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일본국헌법 제70조).[6][7]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오히라 총리의 급서 당일 즉시 총사퇴하였고, 특별 국회 소집 시에는 총사퇴하지 않았다.[9] 이는 중의원 해산 후부터 총선거 후 처음 국회 소집 시까지 사망 등으로 내각총리대신이 없을 경우에는 즉시 총사퇴해야 하며, 내각은 내각총리대신이 없는 시점에서 이미 총사퇴한 것이므로 국회 소집 시에 다시 총사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해석을 취한 것이다.[10]
5. 3. 스즈키 젠코 내각 출범
1980년(쇼와 55년) 5월, 여당인 자유민주당 내의 반란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었다. 이에 내각은 중의원을 해산하고(일명 해프닝 해산), 이미 예정되어 있던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같은 날에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여, 사상 최초로 중참의원 동시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에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면서, 이토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이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로 취임했고, 내각은 형식적으로 총사퇴했다.[2]총사퇴한 내각은 일본국 헌법 제71조에 따라, 선거 후 특별 국회에서 스즈키 젠코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된 7월 17일까지 36일간 직무 집행 내각을 운영했다.[3] 스즈키 젠코 내각은 제2차 오히라 내각의 정책 기조를 이어받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추구했다.
참조
[1]
웹사이트
第69代 大平 正芳|歴代内閣
https://www.kantei.g[...]
Prime Minister's Official Residence
2023-10-08
[2]
서적
大平正芳
[3]
서적
大平正芳
[4]
서적
大平正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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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憲法 第三版
弘文堂
1995
[6]
서적
憲法 第三版
弘文堂
1995
[7]
서적
現代行政全集1政府
ぎょうせい
1983
[8]
서적
注解法律学全集3 憲法Ⅲ(第41条~第75条)
青林書院
1998
[9]
서적
注解法律学全集3 憲法Ⅲ(第41条~第75条)
青林書院
1998
[10]
서적
新版 憲法(下)
有斐閣
1984
[11]
서적
오히라 마사요시
[12]
서적
오히라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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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오히라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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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헌법 제3판
고분도
1995
[15]
서적
헌법 제3판
고분도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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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현대 행정 전집 1 - 정부
교세이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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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주해 법률학 전집 3 - 헌법Ⅲ(제41조 ~ 제75조)
세이린쇼인
1998
[18]
서적
주해 법률학 전집 3 - 헌법Ⅲ(제41조 ~ 제75조)
세이린쇼인
1998
[19]
서적
신판 헌법(하)
유히카쿠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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